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혁명 (문단 편집) === 파장의 확산 === 이후 레닌은 [[독일 제국|독일]]에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유리한 협정]]을 맺으며 사실상의 항복을 하고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동유럽]] 지역을 몽땅 내어주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여기엔 [[핀란드]], [[우크라이나]],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폴란드]] 등의 지역들 또한 모두 포함된 상태였다. 이후 [[독일제국]]은 레닌을 지원하며 노린 것을 이뤘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전세를 호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상태였다. 이미 독일은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부족이 심각한 지경이었고, 잠재적국인 [[미국]]을 배제하고자 보냈던 [[치머만 전보]]가 발각되면서 미국이 참전하는 역효과가 나는 바람에 독일은 더더욱 끝자락으로 밀려났다. 결국 [[1918년]]에 [[백일 전투|독일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했고, 이어서 벌어진 [[킬 군항의 반란]]과 [[독일 11월 혁명]]의 여파로 독일은 항복했다. 또한 1차 세계 대전 뒤 러시아 내부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이 다시 규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고 연합군도 반 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을 건국한다. 여기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수민족들도 일제히 봉기하였고 그 결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독립했다. 한편 볼셰비키는 내전기 중 백군의 구출 계획을 듣자 퇴위 뒤에도 살아남았던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총살시켰다. 볼셰비키와 협력하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좌파)은 상반된 결말을 맞았다.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를 부정하였으나 백군은 더 싫어하였고 러시아 소비에트에 협력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1918년 7월 17일(7월 4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좌파)을 모두 소비에트에서 축출했고, 이에 반발해 사회혁명당(좌파) 측에서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다. 흔히 이 봉기를 '''제3혁명'''이라고도 부르고,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암살하려 시도한 것도 이 시점이다. 흥미롭게도 사회혁명당(좌파)의 봉기가 실패하는 동안 멘셰비키는 오히려 볼셰비키와 협조했고, 1918년 11월 6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멘셰비키측은 전부 복권되었다. 심지어 사회혁명당(좌파)마저도 1919년 1월 봉기의 실패 이후 1919년 2월에는 복권되었다. 이후 사회혁명당(좌파)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볼셰비키를 적극 지원했으나, 볼셰비키는 이들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1921년에 다시 해산되었다. 레닌은 사회혁명당 수뇌부의 사형 집행을 촉구하였으나, 흥미롭게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사형 판결을 받은 12명의 사형집행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스탈린에 의해 전부 처형된다. 최후까지 볼셰비키의 애증의 상대였던 멘셰비키는 직접적으로 금지조치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1919년부터 암묵적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19년 멘셰비키가 건국했던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소비에트 러시아가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비공식적인 탄압이 지속되었고, 1921년의 크론슈타트 선원 반란 사건 이후 멘셰비키도 완전히 와해되고 수장인 줄리어스 마르토프마저 독일로 망명한다. 이후 각 정당과 정치단체의 탈당멤버들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볼셰비키, 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은 전위당에서 관료조직으로 변신하여 제동 없이 폭주하게 되었으며, 훗날 집권한 스탈린은 그러한 탈당멤버들을 전부 숙청함으로써 소련에서의 정치적 다원주의는 고르바초프 집권기가 될때까지 소멸한 상태로 머물고 만다. 이렇게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멸망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러시아 혁명의 확산.jpg|width=100%]]}}} || || {{{#000,#fff 공산당의 확산.}}} ||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반자본·반제국을 외쳤고 지배세력을 타도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서유럽 내 사회주의 세력들에게는 물론 당시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던 나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소련도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가 퍼지기 좋은 환경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 반제국주의·반침략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산주의를 알려,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퍼져나갔다. 실제 여러 방법으로 지원했는데 민족주의 운동에도 상당한 지원을 뒷받침했다. 한반도에서도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실체가 [[3.1 운동]]의 실패로 명백히 드러난 뒤라 열강에게 실망감이 늘었는데 소련이 직접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할 뿐더러 직접 지원까지 하니, 당연히 지지하는 사람이 나온다.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때는 조선인 대표들이 참가하여 당시 사진을 보면 [[태극기]]가 떡하니 등장한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world/news/1535593_14066.html|링크]] 당장 [[쑨원]]만 해도 [[국공합작]]을 지지했으니 이런 분위기는 해방 직후까지 이어진다. 한편 다른 정치 사안들에 비하면 약간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포도주]] 시장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본래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귀족 사회는 중요한 포도주 수요처였는데, 혁명으로 인해 왕실 및 귀족 사회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게 된 것. 게다가 혁명이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금주법/미국|금주법을 시행하고]], 여기에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포도주 업계는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